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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사찰정책에 항거했던 선학원 조사스님들은 임제종 운동의 선풍을 이음과 아울러, 3·1운동으로 당시 옥고를 치르고 있던 만해 용운스님의 출옥에 대비하여 1921년 10월 4일 ‘조선불교 선학원 본부’ 상량식(서울 안국동)을 봉행하여 선학원을 건립했다. 두 달 후 출옥한 만해 용운스님을 중심으로 남전 한규 · 도봉 본연 · 석두 보택스님 등 민족불교 지도자들은 선학원에서 보다 조직적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한편, 한국전통불교 수호와 후학양성에 매진하였다.

1879년 7월 20일(음) 충남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출생. 부친 한응준 선생과 모친 창성 방씨의 둘째 아들로 속명은 유천(裕天), 자(字)는 정옥(貞玉)이다.

19세기말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던 조선의 현실에 눈을 뜨고 출가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24세 되던 해에 설악산 백담사 주지 연곡(蓮谷)스님을 은사로 사문이 됐다. 이때 계명(戒名)은 봉완(奉玩). 이후 건봉사 만화(萬化)스님 법을 이어 법호를 용운(龍雲), 아호(雅號)를 만해(卍海, 萬海)라고 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불교를 구하기 위해 영호(暎湖)·진응(震應)·금봉(錦鋒)스님 등과 함께 임제종 운동을 전개했다. 그 뒤 만주를 돌아본 후 다시 백담사에 머물게 된 스님은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하며 ‘신불교운동’을 제창했다. 이후 경성에서 <유심>을 창간했고,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했다.

이로 인해 스님은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1921년에 출옥하였다. 출옥 직전, 임제종 종풍의 계승과 아울러 출옥 후 만해스님의 주석처를 마련하고자 수좌스님들은 최창훈 외 다수 신도에게 기부를 받아 안국동 40번지에 선학원을 마련, 이 후 스님이 머문 선학원은 항일운동과 불조정맥을 전승하는 민족불교의 주된 터전이 되었다. 이듬해 1922년 선학원 ‘선우공제회’ 창립에 스님은 동참하였다.

1926년 6월 7일, 안국동 40번지를 포위한 종로경찰서 형사들에 의해 지금의 선학원 정문 앞에서 6·10 만세 운동의 주동자로 강제 검거되었다. 1926년은 또한 만해스님이 근대 한국시를 대표하는 독보적인 시집 <님의 침묵>을 펴낸 해이기도 하다. 이듬해 1927년에는 신간회를 발기하고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 총동맹으로 개편하였다. 1931년 선학원에서 발행한 <선원>의 주요 책임자를 역임하며 대중교화에 매진하였다. 1933년에 심우장에 기거, 해방을 앞둔 1944년 6월 29일에 법납 40세(세수 66세)로 서울 성북구 심우장에서 입적했다.
1879 충남 홍성 출생
1905 백담사에서 연곡스님을 은사로, 영제스님에게 수계
1908 학인스님으로부터 '기신론','능엄경' 등을 수학
1909 유점사에서 월화스님에게 '화엄경'수학
1910 「승려취처문제건의서」를 당국에 제출, 「조선불교유신론」 백담사에서 탈고.
1911 박한영 등과 한일불교동맹 체결반대 궐기대회 개최
조선 임제종 종무원 서무부장과 관장에 취임,『불교대전』편찬.
1913 불교종무원을 창설, 통도사 불교강사로도 활약,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
1915 조선 선종 포교당에 포교사로 취임.
1919 3.1운동을 주동, 일경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유명한 「조선독립이유서」제출.
1921 출옥 및 완공된 선학원에서 주석
1922 선학원에서 <선우공제회> 발기 및 <법보회> 발기.
1923 조선불교청년회를 창설, 총재 취임.
1925 오세암에서 선서 『십현담주해』와 시집 『님의 침묵』을 탈고, 이듬해 간행.
1926 6·10 운동 주모자로 거사 3일전 안국동 40번지(선학원)에서 일본경찰에 의해 긴급 검거.
1927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를 발기,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 총동맹으로 개편
1931 선학원 불교잡지 <선원>의 주요책임을 맡아 주요 집필자로 활동하며 대중교화에 매진.
1933 『유마힐소설경』번역을 시작하였고,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에서 기거
1944 6월29일 (음력 5월 9일) 심우장에서 입적